
"그러니 살고싶다면 내게
그 이유를 납득시켜보세요."
비아트리스 외과의
이름
신지 유
信辞 勇
Shinji Yuu
키/ 몸무게
148cm / 40kg
나이
17세
국적
일본
소지품
수첩, 만년필, 손수건
@NOTE_CMS님 커미션.
비아트리스 외과의
외과의 :: 내과에 대비되어 수술로 환자의 질병이나 상태를 치료하는 전문의. 외과(Surgery)는 그리스어인 ‘cheirourgike’에서 기원하였으며, 이를 풀이하면 ‘hand(손)’+‘work(작업)’ 즉, 손으로 하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 유쨩은 커서 뭐가 되고 싶어? “
온 집안 구성원이 의료직인 집안에서 막내였던 어머니의 늦은 막내딸로 태어나 집안의 사랑을 받았으나, 어른들이 관심을 가지거나 자랑스럽게 여기는 친척들은 의료계로 진학하는 아이들이었다. 멀리 보지 않고, 제 손윗형제들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처음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대답에 기뻐하는 어른들을 보는 것이 첫번째였다.
후에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과학보다는 수학을 더 좋아했으나 공부는 즐거웠으며, 사람을 대하는 것 역시 처음은 어려웠지만 곧 문제 없을 정도까지는 익숙해졌다. 의사라는 직업은 충분히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직업이었으며, 제게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또한 의학에 경중이 어디있겠냐만, 기성세대는 으레 수술을 집도하는 외과를 최고의 분야로 취급하기 마련이었다. 집안의 분위기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자연스럽게 유는 외과를 전공으로 어린 나이에 대학에 진학했다.
타고난 손재주와 두뇌, 스스로가 하고자 하는 의지와 이를 뒷받침하는 집안의 배경까지, 외과의가 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혈액공포증 역시 그랬다.
17세가 되던 해, 테러사건에 휘말려 트라우마가 생겼으나 유는 굴하지 않았다.
수술을 집도하지 못 하는 외과의란 헤엄치지 못 하는 물고기와 같은 의미였으나, 직접 수술에 들어가지 못 하는 대신 다른 모든 방면에서 누구도 반박 못 할 업적을 세우기 시작했다.
질병 분류법 체계의 새로운 패러다임 제시, 수술 과정에서의 실수를 줄이기 위한 정밀한 수술 도구 개발, 응급상황에서의 판단력 또한 뛰어났기 때문에 직접 수술실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중계를 통해 수술실의 상황을 지휘하기도 했으며, 어머니를 따라 대학병원 교수로서 혁신적인 교육과정을 제시하여 당대 일본의 외과 의학계의 더 없는 발전을 이루어냈다.
이름
본디 표기대로 발음하면 ‘신지 유우(しんじ ゆう)’ 였으나, 그는 제 이름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용기, 하지만 그 자신은 그닥 용기 있는 이는 아니었다고 여겼으며, 제 이름이 두려운 순간에 등을 떠밀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
해서 부르게 된 1인칭 ‘유쨩’이었으나, 어느순간부터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스스로를 3인칭으로 부르기에 유는 점점 커가고 있었으며, 그런 것까지에 신경을 쓰기엔 너무나도 바쁜 삶이었다.
성격
[리더십 :: 권위적인 :: 자부심]
자신의 분야에 두각을 드러내며 여러 업적을 세웠으니, 권위자로서 제 일에 자부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자기 일을 사랑했으며, 제 손으로는 힘들었으나 결론적으로 사람을 살린다는 것 역시 만족도가 높았다. 사회적인 지위, 직업에 대한 만족도, 그에 따른 명성까지 그 업은 유에게 더없이 자랑스러운 것이었으며, 자신의 분야에 자신감을 가지는 만큼 다른 분야의 권위자를 존중할 줄도 알았다. 다만, ‘외과의’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가졌던 것은 의학계의 구시대적인 위계서열도 한 몫 했었던 관계로, 무의식적으로 그녀 또한 외과가 제일의 분야이며, 은연중에 정신의학과의를 하대하는 경향 또한 있었다.
전생의 삶
▷ 낯을 가리는 성격과 부모님의 교육욕에 보통의 어린이라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나이, 유는 홈스쿨링을 시작했다. 시간표를 나누어 집에서 가정교사와 공부를 하거나, 어머니와 함께 병원으로 가 시간을 보냈다. 종일 집에 있으며 빠른 속도로 지식을 습득했으니, 보통의 또래보다 월등히 빠르게 지식을 쌓아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그리고 15세가 되던 해, 전문의 교육과 대학 학위 취득을 위해 유학을 결정한다. 걱정했던 것보다 학교는 적응하기 쉬웠으며(대학이었던 만큼 또래보다는 연상의 학생들과 공부했던 탓도 있다), 공부 역시 힘든 일이 아니었다. 친한 친구도 생겼으며, 성적 또한 우수했다. 빠르게 학교에 적응해갔다.
▷ 문제 없는 학교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재난은 예고없이 들이닥쳤다. 동기들과 함께 관람한 교내 축구 친선경기장에서 일어난 테러로, 눈 앞에서 사람이 찢어지는 것을 목격함과 동시에 그날의 기억은 끊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심각하지 않은 외상과 외과의가 될 그녀에게는 더없이 치명적인 장애-알아채는 것은 조금 더 이후의 일이었으나-를 얻은 채였다. 사건의 범인이 그녀의 가장 가까웠던 친구라는 것은 전해들었으나, 이후 자취를 감췄기 때문에 사건의 전말에 대한 그 어느 것도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원망조차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 혈액 공포증 :: (※실제의 공포증 증상과는 무관하며, 창작에 의한 가상의 질병입니다.) 사건의 트라우마로, 일종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사람의 몸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는 것을 목격할 경우 심한 구토감 및 경우에 따라 기절 증상을 보였으며, 단순히 베인 상처나 사진, 영상 등 매개체를 통한 노출, 혈액 팩 등에는 작은 어지러움 증세 정도로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었다. 전문의-유의 언니-는 무의식의 영역에 의한 것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완전한 치료는 불가능하나 완화는 기대해 볼 법도 했는데, 환자 본인이 정신과 치료를 원활하게 받아들이지 못해 차도가 없다고 판단하여 사실상 방치해 두었다고 보는 게 옳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쌓아올린 업적은 눈부셨다.
▷ 38세가 되던 해, 중요한 사건은 또 예고없이 찾아왔다.
신지 유가 근무하던 병원 인근에서 일어난 5중 추돌 교통사고 현장에서, 출근하던 중 간발의 차로 사고를 면했으나 현장을 그대로 벗어날 순 없었다.
‘어쩌면 지금은 괜찮지 않을까?’
안일한, 그러나 정의로운 생각으로 응급 처치를 위한 현장에 뛰어들었으나 사고의 현장에 의해 짓눌러진 환자를 목도하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자리에서 도망치는 것 뿐이었다. 생애 마지막으로 내었던 용기의 결과는 결국…
▷ <살인자>. 언론은 유명한 의사인 그녀가 현장에서 도망친 것을 그렇게 비난했다.
▷ 죽도록 치열한 인생이었다. 어느 순간에도 최선을 다 했으며, 누구도…
누구도 그녀에게 비난을 던질 자격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리고 얼마 후, 신지 유는 교외의 사택에서 홀로 눈을 감았다.
